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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시가 남한 최초 구석기 유물 발굴지 ‘점말동굴’, 현존 최고(最古) 저수지 ‘의림지’등 유구한 역사를 바탕으로, 지역 종교 문화 및 역사 알리기에 나섰다.
과거부터 제천은 대한민국 국토 중앙 교통요충지, 월악산·금수산 등 빼어난 산세, 농경문화·호서학파 기원 ‘의림지’ 등 다양한 장점을 가진 ‘역사도시’로 오랜 세월동안 형성됐다고 알려진 도시다.
사실 제천은 지대가 높고 산세가 깊어 농경 발전이 어렵다는 한계점을 가진 도시다. 이렇듯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자긍심과 주체성을 가지고 국가의 위기엔 선봉장에 섰다.
몽골, 왜구 등 외세의 침략에 호국의 선봉장에 섰고, 권상하 등 걸출한 선비를 배출해 유교 학풍을 이끌었으며, 조선말기 을미의병을 일으키며 일제강점기 구국 의병운동에 신호탄을 쐈다.
제천은 시대 흐름을 그대로 반영한, 말 그대로‘한국 역사의 산증인’이다.
한편 시가 보유했다고 밝힌 자원은 고대 민간신앙부터, 삼국시대~고려시대 불교, 조선시대 유교·천주교, 현대 세계기독교박물관에 이르기까지 다채롭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 민간신앙 : 칠성봉
규장각에 보관된 제천현 지도(1872년경)에 표시된 칠성봉은 북두칠성(국자) 모양의 작은 봉우리들이다. 흔히 민간신앙으로 분류되는 칠성신앙은 인간의 길흉화복, 장수, 재물을 관장한다고 알려진 칠성신을 섬기고 있다. 과거 선조들이 제천에 터를 잡은 것도 이 기운을 받기 위함이라 여겨지며, 실제로 현재까지 칠성봉 주위로 시내 중심가가 형성됐다. 지난 2월까지도 제10회 칠성봉기원제를 봉행하며 시민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명칭은 각각 1봉 독송정(獨松亭), 2봉 연소봉(燕召峰), 3봉 성봉(星峰), 4봉 요미봉(要美峰), 5봉 자미봉(紫美峰), 6봉 아후봉(衙後峰), 7봉 정봉산(丁峰山)이다.
▲ 불교문화 : 정방사, 장락동 7층 모전석탑, 덕주사
<정방사(662년 창건, 제천시 수산면 옥순봉로12길 165)>
신라 문무왕 2년(662년) 때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사찰이다. 해발고도 1,016m 금수산 신선봉 능선에 있다. 의상이 도를 얻은 후 절을 짓기 위해 지팡이를 던지자, 이곳에 날아가 꽂혀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목조관음보살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를 비롯한 각종 탱화(불화·佛畫)들이 봉안돼있다.
수를 놓은 비단결처럼 아름답다는 금수산 자락과 청풍호반이 한눈에 내려다 보여 제천에서도 ‘비경’으로 꼽힌다.
<장락동 7층 모전석탑(보물 제459호, 제천시 장락동 65-2)>
모전석탑은 세계에서도 극히 드문 사례다. 돌을 하나하나 벽돌 모양으로 깎아 이를 쌓아야 하니 재료나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고, 무너지지 않으려면 균형을 잘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특유의 멋스러움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경북 북부지역에서 나타났으니, 제천에 있는 것은 다소 이례적이다.
대략 10세기경 건립된 이 석탑은 층간 균형과 비례가 안정돼, 나말선초부터 지금까지 1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원형을 보존하며 1967년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됐다.
한편 조선시대에 절은 폐사됐으나, 이 탑을 지키고자 현재는 탑의 동쪽에 장락사가 창건됐다.
<덕주사(587년 창건, 제천시 한수면 미륵송계로2길 87)>
신라 진평왕 9년(587년) 때 월악산(月岳山)에 창건됐다고 구전된다. 신라 마지막공주 덕주공주와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마애불을 보고 함께 세웠다는 전설이 유명하다. 이 마애불(마애여래입상)은 과장된 얼굴을 하고 있는 13m 불상이다. 고려시대 불상의 대표적 특징을 갖는 형태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4년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됐다.
▲ 유교문화 : 관란정, 자양영당(서원), 용하구곡
<관란정(1845년 건립,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산14-2)>
관란 원호(1396~1463) 선생은 세종 때 과거에 합격해 직위가 집현전 직제학에 이른 문신이다. 계유년 삼촌 수양대군(세조)이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정권을 장악하자(계유정란), 선생은 충의를 지키기 위해 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생육신).
이 후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영월(청령포)에 유배되자, 현재 관란정 자리에 단을 세우고 단종을 그리며 밤낮으로 영월을 향해 절을 올렸다. 관란정 앞 평창강은 단종이 있던 청령포로 흘러가는데, 선생은 여기에 채소, 과일 등을 표주박에 담에 물에 띄웠다고 전해진다.
세조가 사약을 내려 단종이 사망하자 삼년상을 치르고 그길로 고향에 돌아갔다. 그 학문이 깊어 특별히 호조참의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거절하고 사망 시까지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후기 그의 후손들이 그 충정을 기리기 위해 그가 단을 세웠던 곳에 정자와 유허비(추모비)를 세웠다.
올라갈 땐 야트막한 야산이나 정상 아래엔 깎아진 듯한 절벽이 있으며, 그 아래 한반도 모양의 지형과 평창강이 그의 충정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다.
<자양영당(1889년 건립, 제천시 봉양읍 의암로 566-7)>
조선 말기 유학자 유중교(1832~1893)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1895년 단발령이 시행되자 유인석(1842~1915)을 비롯한 선비들이 비밀회의를 하고 창의(倡義·의병을 일으킴)했다. 이를 ‘호좌창의진’이라하며, 항일독립운동 진원지로 평가된다.
영당은 상시적으로 개방하고 있으며, 바로 옆이 제천의병전시관으로 꾸며져 제천의병사와 그 발전사를 관람할 수 있다. 시에서는 매년 춘(추)향제(음력 3월 20일, 음력 9월 20일)를 지내며, 10월에는 의병제를 열어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용하구곡과 의당 박세화 선생(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용하구곡은 의당 박세화(1834~1910) 선생과 제자들이 깊은 계곡에 들어가 국운의 안녕과 평안을 빌며 새긴 9개의 글귀다. 조선 말 자주성을 상실한 현실을 물리치고 좋은 경치(선경·仙境)에 글귀를 새겨 국운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전국을 돌다 제천에 정착한 의당 선생은 용하구곡을 만든 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다시 거의(擧義·의병을 일으킴)키다 옥고를 치렀고, 덕산면에서 용하영당을 창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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